2008년 08월 25일
# by 높새바람 | 2008/08/25 07:50 | 트랙백 | 핑백(1) | 덧글(46)
2008년 08월 23일
바깥-바깥-(바깥)-몸쪽은 볼배합의 오래된 정석이다. 어느 나라의 리그든지 야구를 꾸준히 보는 야구팬이라면 이 볼 배합을 일주일에 열 번 이상은 볼 수 있다. 까닭은, 바깥쪽 볼에 익숙해진 타자의 눈에 갑자기 확 들어오는 몸쪽 빠른공은 실제보다 더 빠르게 보여 루킹삼진이나 헛스윙삼진을 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뜬금없지만, 이를 염두에 두자. 그리고 발빠른 주자가 1루에 있을 시에 포수가 타자의 방해 없이 2루에 송구하기 쉬운 바깥쪽 위주의 볼배합이 이루어지는 것도 오랜 정석 중 하나다. 그리고 같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투수 이와세가 던지는 구질이다. 이와세는 주종이 포심, 그리고 좌타자의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횡변화 고속 슬라이더이며 빼어나지는 않지만 슈트나 스크류볼 등의 역회전성 구질을 조금 던질 줄 아는 투수다. 이중에서 슈트와 스크류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라서, 사실 이와세는 직구과 고속슬라이더의 2구질 투수에 가깝다. 하지만 흘러나가는 빠른 슬라이더는 직구와 구별하기 힘들며 우완투수의 것은 우타자가, 좌완투수의 것은 좌타자가 치기 어렵다. 이와세는 좌완투수이며 이승엽은 좌타자다. 자, 이제 차려진 상황을 보자. 무사 상태에서 이용규가 유격수를 스치는 좌전안타로 1루에 출루했다. 후에 인터뷰에 따르면 도루할 생각은 없었다고 하지만, 1루주자 이용규는 투수가 신경쓰일만큼 충분히 2루쪽으로 리드하고 이와세-야노 배터리는 이용규의 도루가능성을 계속 염두에 둔 상태에서 다음 타자를 맞게 된다. 볼배합은 이용규가 배터리의 신경을 건드리면 건드릴 수록 도루 타이밍을 주지 않기 위해 빠른 직구 위주로 갈 수밖에 없다.
<공을 던지기 전 투수는 1루주자를 본다>
이어지는 타자는 김현수. 포수 야노는 이와세의 공을 바깥(슬라이더,볼)-바깥(직구,스트라이크)-몸쪽(->바깥으로 변화하는 슬라이더,볼)-바깥(직구,볼)-바깥(슬라이더,볼,헛스윙)순으로 유도했고 김현수는 마지막 흘러나가는 고속슬라이더에 헛스윙 아웃되었다. 바깥쪽으로 들어오는 공들을 타자 김현수가 커트하지 않고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것은 이와세의 바깥쪽 구질 변화와 그에 대한 심판의 스트라이크존 판정에 익숙치 않아서 스윙을 주저했기 때문인데, 스트라이크에도 스윙이 나오지 않다는 점에서 타자의 선구안이 흔들리고 있음을 간파한 배터리가 유인구로 헛스윙을 유도했고 성공했다. 그리고 이승엽의 차례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바깥(직구,스트라이크)-바깥(슬라이더,스트라이크,파울)-바깥(슬라이더,볼)-바깥(직구,스트라이크,파울)-몸쪽(직구,스트라이크,홈런)으로 유도가 되었는데 초구의 직구가 스트라이크존에 걸치는 것을 본 타자 이승엽이 거의 같은 코스로 들어오는 2구를 커트해낸다. 바깥쪽 볼에 배트가 따라나오는 것을 본 포수가 헛스윙을 유도하기 위해 던진 3구째의 바깥으로 완전히 빠지는 슬라이더는 이승엽이 잘 골라낸다. 슬슬 타자의 눈이 바깥쪽 공에 익숙해지고 타자의 방망이가 바깥쪽 공에 타이밍을 맞춰간다고 판단한 야노 포수는 정석에 따라 4구째로 몸쪽 직구를 유도한다. 그러나 주자 이용규의 넓은 리드가 신경쓰인 투수 이와세가 1루에 견제를 했기 때문에 포수는 다시 사인을 변경하게 되고, 투수는 그에 따라 4구째로 다시 바깥쪽 직구를 던진다. 이번에도 이승엽이 파울을 쳐낸다.
투수 이와세는 슬로우커브나 체인지업 종류의 느린 구종이 없고 퀵모션이 빠르기 때문에 사실 도루를 시도할 가능성은 낮았지만, 1루주자 이용규는 계속 투수를 흔들어서 직구 및 변화구 구속의 완급조절을 막는다. '느린 공? 던져봐. 난 뛸 거야.' 이렇게 되면 타자는 히팅 타이밍을 맞추기 수월해지는데 실제로 이와세의 슬라이더 속도는 시속 130km대 초반에서, 직구 속도는 140km언저리에서 고정된다. 그리고 타자 이승엽이 앞타자와 달리 바깥쪽이라도 볼은 골라내고 스트라이크는 계속 커트해내고 있었기 때문에 결정구로 바깥쪽 직구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도 없고, 헛스윙을 유도하는 볼 코스의 유인구를 던지기에도 마땅치 않다. 그렇다면 포수는 정석대로 삼진을 잡거나 최소 볼이 되더라도 바깥쪽 유인구를 던질 밑밥을 깔기 위해서 몸쪽 빠른공을 요구하게 된다. 한편 타자의 경우 본인이 노리는 코스가 있으면 비슷하게 들어오면 쉽게 방망이가 나간다. 특히 살짝 맞춰 안타를 만드는 컨택형 타자보다 정확히 맞춰 한방을 노리는 중장거리 타자일 수록 노리는 코스의 유인구에 쉽게 방망이가 나간다. 이전까지 이승엽이 삼진이 많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배팅폼과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노리는 코스의 유인구에 계속 말려들었기 때문이다. 이와세-야노 배터리의 볼배합은 이승엽이 좌타자라는 점에서 김현수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아마 김현수를 상대로 한 볼배합을 본 이승엽도 몸쪽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5구째의 몸쪽 직구는, 바깥쪽을 집중력있게 고르고 커트해 낸 이승엽이 기다렸던 코스가 아닐까 생각된다. 딱. 하늘을 반으로 가르는 거대한 아치. 홈런. 여기까지가 이승엽의 홈런이 만들어진 과정이다. 배팅 밸런스가 무너진 타자는 아무리 공이 노리던 코스로 들어오더라도 쉽게 안타성 타구를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SBS의 특별 해설을 맡은 SK의 김성근 감독이 말했듯이 미국전 첫 안타 이후 처음으로 이번 홈런의 순간 이승엽의 스윙폼이 제대로 돌아왔다. 이 홈런이 정말 드라마일 수밖에 없는 것은 딱 그 순간, 그 한 순간 올림픽기간 내내 행방불명상태였던 스윙폼이 기가 막히게 돌아왔다는 것이다. 투수의 구질, 이용규라는 주자의 빠른 발 및 투수 흔들기, 좌타자라는 속성, 그리고 볼을 고르고 스트라이크를 커트해낸 이승엽의 선구안, 이러한 것들이 엮이면서 5구째의 몸쪽 직구가 들어오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계산되고 예측될 수 있는 것이며 이렇게 공 한 개 한 개에 벌어지는 치밀한 수싸움 승부는 분명 다른 스포츠가 갖지 못한 야구만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진정 야구가 드라마일 수 있는 것은 그 잘 짜여진 한 순간의 기회를 얻은 이승엽에게 잃어버렸던 최상의 스윙이 돌아오는 것과 같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래서 야구팬들은 팀이 무너지고 연패의 늪에 빠져도 절대 야구를 끊지 못한다."1년 중 가장 슬픈 날은 야구 시즌이 끝나는 날이다." -토미 라소다. 전 LA 다저스 및 미 국가대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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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높새바람 | 2008/08/23 04:02 | 트랙백(4) | 핑백(1) | 덧글(28)
2008년 08월 04일
* 이 글에는 영화에 대한 심각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탄환이 빗발치던 귀시장에 비가 쏟아진다. 한 사내가 전신에 흐르는 피가 빗물에 녹아내리는데도 비틀거리는 몸으로 흙탕물 가득한 도로 위를 기어간다. 살기 위한 몸부림. 그 모양을 비웃는 절대적 가해자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 그리고 벌어지는 손가락 절단의 의식. 이 순간 느꼈던 감각은, 항간에 열띠게 회자되는 '무릉도원' 박도원(정우성 분)의 총 돌리는 간지보다, 고전 게임 '카발'의 클리어 장면을 연상케 하는 쌍권총 윤태구(송강호 분)의 도망치는 걸음걸이의 유머보다 더 깊이, 더 강하게 필자의 시상하부에 남아있다. 굳이 그 감각을 이름 붙이면, 신체 소실에 대한 공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의 공포는 신체 소실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통해 관객들에게 거의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피투성이가 된 몸에 왼 다리를 뚫고 땅에 박힌 칼날과 짓눌러대는 사람들의 무게로 손 발 하나 꼼짝하기 어려운, 그러나 전신의 신경도 의식도 새파랗게 살아있는 순간 딱히 잘 들지도 않는 칼에 손가락이 썰려나가는 고통이란 어떤 것일까. 그 순간 만길(류승수 분)의 표정과 발악, 그리고 온 내장을 비틀어 토해내는 비명, 그리고 태연하기 그지 없는 가해자 창이(이병헌 분)라는 극도로 대비되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모습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만길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되고, 그 동정심의 크기란 피해자가 처참할 수록 가해자가 잔인할 수록 그래서 둘의 대비가 강하면 강할 수록 더욱 커져서 "야, 딴 칼 가져와."라는 창이의 대사가 떨어질 때 쯤이면 이미 관객의 심리는 만길과 상당히 동화된 상태에 이른다. 만길의 공포, 몸의 일부를 잃는다는 공포는 신체 기능을 잃는다는 점에서 죽음의 공포와도 맞닿아있지만 그 소실의 고통을 그대로 받아내어야 하고 (자르는 칼이 들지 않으면 않을 수록 더 고통스럽다.) 다시 그 불구가 된 신체를 이끌고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죽음보다 훨씬 강하게 이성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쥐어비튼다. 그리고 극장이라는 공간에서는 오감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자기도 몰래 자신의 왼손 검지를 쓰다듬어보게 하는 관객의 체험적 공포로 전이된다.
나아가 신체 소실의 공포라는 키워드는 박창이라는 캐릭터의 형성과 이해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반부 만길의 장면에서 보여준 신체 소실의 공포는, 결국 후반부 창이가 태구를 쫓는 이유와 그러한 창이의 심리를 관객들에게 이해시키는 복선적 장치가 된다. 산 채로 손가락을 잘라내는, 일순간도 아니고 희생자의 비명과 몸부림을 무시한 채 악에 절어서 억지로 억지로 끊어내려고 하는 그 광기어린 천연덕스러움은 영화 후반부에 창이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그가 과거에 받았던 초월적 공포로 인해 정신의 어느 한 부분이 망가져버렸음을, 창이 본래의 잔인성을 극단에 치닫게 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창이라는 인물에게 윤태구를 죽이는, 그리고 영화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죽이기 전에 그의 손가락을 잘라내가는 일은 과거 태구에 의한 손가락 절단, 그 때의 공포로 찢어진 그의 정신을 동일 보복을 통해 치유하는 창이 나름의 방법인 셈이다. 장갑 속에서 철제 가짜 손가락을 꺼내 귀에 가져다 대는 순간, 존재하지 않는 허공을 찢는 아득한 비명이 스크린을 가로지른다. 환청. "들려?" 놈놈놈을 두 번 보면서 필자는 창이가 만길의 손가락을 '써는' 씬을 화질도 깨끗한 디지털 상영극장에서 비명도 신음 한 번도 없이 두 눈 똑바로 뜨고, 팔걸이를 움켜 쥐고 지켜보았다. 사실 이러한 반응은 다가오는 공포를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마주함으로써 극복하려는 역공포 증후군적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이 가장 강하게 뇌리에 남은 것은 필자가 그 장면, 아니 그 장면을 접한 필자의 신경을 타고 전해지는 몸의 일부를 영영 잃어버리는 상황을 정말로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시장의 장면에서 만길의 손가락이 잘리지 않고 상황이 마무리 된 것은, 어쩌면 관객들을 극단적 충격에서 보호하기 위한(그리고 그 다음에 돌아올 악평을 피하기 위한) 감독의 계산이었을 수도 있다. 한 줄 요약: 놈놈놈은 웨스턴에 개그에 호러영화도 섞어놓았다. 필자는 겁쟁이. 공포 치료엔 빠삐놈이 최고.
# by 높새바람 | 2008/08/04 22:56 | 트랙백(1) | 덧글(32)
2008년 08월 04일
'바칼로레아'라고 하는 프랑스의 대학입학시험은 보통 70%정도의 합격률을 보이며 여기에 합격한 사람들은 자신이 지망하는 학교 및 학과에 선착순으로 지원하면 그 대학교를 다닐 수 있다. 실제로 명문대학으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소르본은 13개 '파리대학'중의 제 4대학에 불과하며 여기에 대한 입학 또한 선착순이다. 이러한 사실은 대학의 서열화와 실제로 존재하는 그 서열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꽤나 낯섦과 동시에, 선착순으로 입학하는 학교의 학생들은 사실 별 것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한국의 교육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다는 글에 프랑스 대학 입학의 수월함을 거론하는 것이 조금 이상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프랑스의 대학은 입학이 쉬운 만큼 사회적인 인지도도 딱히 높은 편이 아니다. 프랑스의 대학 입학이 어렵지도 않고, 어려울 필요도 없는 까닭은 사실 프랑스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고등교육기관인 '그랑제꼴'이 엘리트 교육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정부의 지원 기업과 사회적 인지도 및 선호도의 모든 면에서 일반 대학을 압도하는 '대학 위의 대학' 그랑제꼴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바칼로레아에서의 고득점은 물론, 그랑제꼴 입학만을 위한 입시 준비로 2,3년을 보내야 한다. 그렇게 입학한 학생들의 사고력과 지식의 폭은 우리에 비하면 놀랄만한 정도로, 한 가지 예로 교사와 교수가 되기 위한 필수코스인 고등사범학교(Écoles Normales Supérieures)의 경우 움베르트 에코와 같은 세계적 지성들이 직접 강의를 하며 그들과 토론이 이루어진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움베르트 에코가 강의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움베르트 에코가 라틴어로 하는 강의를 이해하고, 그것을 주제로 토론하는 학생들의 지식과 이해도, 그리고 사고력이다. (혹시나 그 대단함이 와닿지 않는 분들을 위해 억지로 비유하자면, 워렌 버핏과 함께 3년 후의 우량주 예측 선정과 투자 여부에 대해 열띠게 토론하는 것과 비슷한 역량입니다.) 그런 학생들의 역량은 곧 사르트르, 라캉, 들뢰즈를 키워내고 수 많은 베스트셀러 저서들을 생산하며, 물리학과 같은 이공분야에서조차 독일과 함께 최정상의 위치에서 배출한 석학들로 세계의 지성계를 이끌어가는 프랑스의 힘이다. 그 토대는 물론 프랑스의 공교육이다. 사실 재수에 삼수, 사수까지 하면서 서울대나 각종 의대에 들어가기 위해 한국 학생들이 쏟아붓는 시간과 노력은 결코 그랑제꼴을 목표로 하는 프랑스 학생들의 그것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과 미래를 걸고 현재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그 노력으로 키워지는 역량의 차이는 쉬이 설명할 수조차 없다. 이것은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공부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창조하는 힘을 기를 수 있는 폭 넓은 기초교양을 우리의 공교육은 공교롭게도 완벽에 가깝게 배제한다. 한 때 위기를 느낀 대학마다 교양 학년과 전공 학년의 분화와 같은 방식으로 기초교양을 강화한 커리큘럼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그 커리큘럼의 수업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수재들의 '형편없는 수준' 덕택에 차례차례 실패로 돌아갔다. 문학 수업의 예를 들자. 한 편의 문학 작품에서 저자는 그가 사회와 인간에 대해 깨달은 바와 사상을 이야기에 녹여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독자에게는 작품 안에 녹아있는 저자의 사상을 풀어 끄집어내는 능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12년의 공교육 기간동안 작품을 읽어내는 눈을 키우지 못했으니 대부분의 학생들이 써진 이야기만 줄줄 따라가는 데에서 책 읽기를 끝낸다. 사상과 시대배경에 대한 선이해가 없으니 강의 자체가 공중에 붕 떠버린다. 그리하여 문학은 고사해가고, 독자들은 한 없이 줄거리 위에서 표류한다. 더욱 골치 아픈 현실은 가르치는 이들이 아무리 힘주어 역설해도 그 부족함을 깨닫는 이들은 너무나도 적다는 것이다. 지식의 전달체계 속에서 지식이 소통되지 않는다. 이러니 웹 2.0시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의 장이 마련되어도 기대할 수 있는 성장 결과란 극히 작다. 실제로 학교 게시판에 남는 이야기는 "그 강의 재미 없고 성적 짜니까 듣지 마라." 우리 공교육에서 가르치는 것을 정말 온 삶을 다해 열심히 공부해 온 결과가 이렇다면 사회뿐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도 너무 비참한 현실이다. 많은 이들이 우리 교육의 병폐로 입시제도를 탓하지만, 입시가 결국 배운 것들을 테스트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결국 배우는 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답이 나온다. 교육제도에 대한 문제가 수 차례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육에서 정말 보잘 것 없는 취급을 받는 철학, 사학, 문학과 같은 과목들이 모든 분야의 학습의 바탕인 사고력을 키우고 사람을 만들어가는 것임을 위정자들이 모르는, 혹은 무시하는 까닭은 그들 역시 딱히 그러한 공부를 해본 적도 중요성을 느껴본 적도 없기 때문일까. 위정자의 무지와 그들이 만들어낸 제도로 인한 대중의 무지, 그리고 그 속에서 배출되는 역시나 별반 다를 것 없는 위정자들이라는 순환고리로 인해 어쩌면 우리 사회는 경제적 풍요와는 반대로 지성의 사막화를 거듭해 왔는지도 모른다. 이제 바야흐로, 그 무지한 위정자들이 주장하는대로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오면 우리 사회를 이끄는 1%의 엘리트들은 프랑스, 독일, 영국의 엘리트들과 경쟁해야 한다. 결과가 짐작되지 않는가. 성적을 위해 영어를 공부시키는 나라의 학생들은 수천 년 간 쌓인 지혜를 가르치기 위해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나라의 학생들을 이길 수 없다. 조악하지만 싸움의 이야기니 무기를 예로 들어보자. 현대 무기를 전쟁의 역사동안 이어져 온 인류의 무기 제조 기술의 발달 결과라고 한다면 지적 싸움에서 현대의 무기와 같은 것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쌓여온 지성의 발달 결과, 즉 철학이다. 인간 존재 그 자체가 유사 이래 발전한 것이 있다면 곧 플라톤과 공자 이후의 수 많은 지성들의 사유활동을 통해서 얻어진 지적 깨달음일 것이다. 그 깨달음이 지금까지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지식들을 전혀 배우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이들이 과연 스스로 이천 년 전의 사람들보다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교육이 지금과 같다면, 우리는 M-16을 든 적들 앞에 마제석기와 짐승가죽으로 무장한 군대를 내보내야 한다. 얼마 전 박경리 선생에 이어 이청준 선생이 작고하였다. 가뜩이나 지성을 홀대하는 풍토 속에서 그나마 세상을 꾸짖고 귀기울이게 할 수 있는 힘을 지닌 분들이 떠나고 있다. 이렇게 한 시대의 위기의식을 끌어안고서 사막같은 조국에서 잡초처럼 살아온 지성들이 하나 둘 씩 운명하고, 정말 씨앗이 뿌리조차 내릴 수 없는 사막만이 남으면 우리 사회는 어찌 될까. 이미 한국이 공교육의 모델로 삼아온 미국, 일본의 공교육 체계는 계속된 실패를 겪으며 쇄신안이 등장해 왔다. 이제 우리도 모델과 교육의 지향점, 그리고 현존하는 모든 교육 단계의 커리큘럼의 대안으로 서유럽의 모델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사고하는 힘을 길러주어야 창조적 지성도 전인교육의 대의도 이룰 수 있다. 그나마 기댈 게 사람밖에 없는 나라에서 진정한 사람을 기르지 않으면 미래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 by 높새바람 | 2008/08/04 07:51 | 트랙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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